니콜로 마키아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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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외교관, 정치 철학자, 역사가, 극작가, 시인으로, 현실주의 정치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1469년 피렌체에서 태어나 1527년 사망했으며, 메디치 가문 몰락 후 피렌체 공화국에서 공직을 맡아 외교와 군사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가 있으며, 이 책들은 주권자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정치 사상을 담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국가의 이익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통치자가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나 때로는 비정한 수단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용어를 낳았다. 그의 사상은 근대 서구 정치 지도자들과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실주의 이론의 기초를 제공하고 공화주의 사상의 원류 중 하나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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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마키아벨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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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니콜로 마키아벨리 |
로마자 표기 | Niccolò Machiavelli |
영어 표기 | Nicholas Machiavel |
이탈리아어 표기 | Niccolò Machiavelli |
출생일 | 1469년 5월 3일 |
출생지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사망일 | 1527년 6월 21일 |
사망지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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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배경 | |
학파 | 서양 철학 르네상스 철학 고전적 현실주의 공화주의 |
주요 관심사 | 정치 정치철학 군사 이론 역사 |
주요 저서 | |
주요 저서 | 군주론 디스코르시 전술론 피렌체사 만드라골라 |
결혼 및 가족 | |
배우자 | 마리에타 코르시니 (1502년 결혼) |
주요 사상 및 영향 | |
주요 사상 | 고전적 현실주의 비르투 현대 공화주의 국익 |
영향 받은 인물 | 크세노폰 플루타르코스 페트라르카 타키투스 폴리비오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 티투스 리비우스 투키디데스 단테 알리기에리 이븐 할둔 Ibn Zafar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마르실리오 피치노 |
영향을 준 인물 및 사상 | 정치적 현실주의 프랜시스 베이컨 토머스 홉스 제임스 해링턴 장자크 루소 잠바티스타 비코 바뤼흐 스피노자 에드워드 기번 데이비드 흄 존 애덤스 마르키 드 사드 en:Vincenzo Cuoco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프리드리히 니체 빌프레도 파레토 미하일 바쿠닌 안토니오 그람시 루이 알튀세르 토머스 셸링 안토니오 네그리 케네스 월츠 드니 디드로 카를 슈미트 줄리오 안드레오티 필립 페팃 레오 슈트라우스 막스 베버 장샤를레오나르 시몽드 드 시스몽디 한나 아렌트 |
초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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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사상가이자 외교관, 군사 전략가이다. 그는 격동기의 피렌체 공화국에서 태어나 공직 생활을 하며 다양한 정치적 경험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주의적인 정치 철학을 발전시켰다.
1469년 피렌체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부유하지는 않았다. 그는 인문학 교육을 받으며 고대 로마와 고대 그리스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았다. 1494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되고 공화정이 복원되자 공직에 투신하여, 1498년부터 1512년까지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국의 서기장 및 '자유와 평화의 십인 위원회' 서기장을 역임했다.[27] 이 기간 동안 그는 외교 사절로서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로마 교황청 등 여러 국가를 방문하며 국제 정세와 권력의 본질을 직접 목격했다. 특히 체사레 보르자와의 만남은 그의 정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28] 또한, 용병의 폐해를 절감하고 시민군 창설을 주도하여 1509년 피사 정복에 기여하기도 했다.[29][31]
그러나 1512년 스페인 군대의 도움으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 복귀하면서 공화정은 무너졌고, 마키아벨리는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었다.[32] 1513년에는 메디치 정권에 대한 반란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나,[33] 교황 레오 10세의 선출 특사로 석방되었다.[166][167] 이후 그는 피렌체 근교의 농장에 은둔하며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경험과 고전 연구를 바탕으로 《군주론》(1513년경)과 《로마사 논고》(1517년경) 등 중요한 저작들을 집필했다. 《군주론》에서는 국가의 유지와 번영을 위해 군주가 때로는 비도덕적인 수단까지 동원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정치관, 즉 마키아벨리즘을 제시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165] 반면 《로마사 논고》에서는 공화주의 사상을 심도 있게 탐구하며 시민적 덕성과 법치, 공화정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말년에는 메디치 가문의 의뢰로 《피렌체사》를 집필하는 등 부분적으로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으나, 1527년 로마 약탈 사건으로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에서 추방되자 그 역시 설 자리를 잃었다. 공화주의자들에게는 메디치 가문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실의에 빠졌고, 같은 해 58세의 나이로 병사했다.[36] 그의 무덤은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다.
2. 1. 출생과 가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변호사 베르나르도 디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그의 아내 바르톨로메아 디 스테파노 넬리 사이에서 태어난 세 번째 자녀이자 첫째 아들이었다.[20][143] 마키아벨리 가문은 고대 토스카나 후작들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여겨지며,[145] 피렌체 공화국에서 여러 요직을 역임한 명문가로,[144] 피렌체의 사법 총장 13명을 배출했다고 한다.[21] 사법 총장은 추첨을 통해 2개월마다 선출된 9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집단의 직책 중 하나이며, 정부 또는 피렌체 시뇨리아를 구성했다.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변호사였으나[143] 가정 형편은 부유하지 않은 중산층이었다. 마키아벨리는 후에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다. 그래서 즐기는 것보다 고생하는 것을 먼저 배웠다"라고 적었다. 마키아벨리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부모의 사랑 속에서 자랐고, 그의 스승 파올로 다 론치글리오네에게 문법, 수사학, 라틴어를 배웠다.[25] 당시 피렌체는 유럽 고대 그리스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나, 마키아벨리가 그리스어를 알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26] 그는 상류층의 필수 교양이었던 고대 로마와 고대 그리스 고전을 배우며 성장했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는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교황령, 프랑스,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등 외세의 개입 속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격동기였다.[24] 그의 청소년기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통치, 1494년 메디치 가문의 추방,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신정 정치와 그의 몰락(1498년) 등 피렌체 공화국의 혼란스러운 사건들과 겹친다.
1501년 마키아벨리는 마리에타 코르시니와 결혼하여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 자녀는 아들 다섯 명(프리메라나, 베르나르도, 로도비코, 기도, 피에로)과 딸 두 명(바치나, 토토)이다.[22][23]
2. 2. 피렌체 공화국 관료
1494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축출되고 공화국이 복원될 무렵 공직에 진출하였다.[27] 1498년, 사보나롤라가 처형된 직후,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국의 서기장으로 임명되어 1512년까지 재직했으며,[27] 정부의 공식 문서 작성을 담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와 평화의 십인 위원회'(Dieci di Libertà e Pace) 서기장[27] 및 통령 비서관도 겸임하게 되었다. 1499년에는 십인 위원회 서기관으로서 매우 분주한 시기를 보냈다.
마키아벨리는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외교 사절로서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1500년, 1504년, 1510년-1511년), 로마 교황청 등 여러 외국 궁정에 파견되었으며, 이러한 경험을 통해 독자적인 정치적 견해를 구축해나갔다. 1500년에는 피사와의 전쟁에 군 고문의 부관으로 참여했으나, 프랑스 용병 문제로 전쟁이 실패하자 책임을 해명하기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기도 했다. 1501년과 1502년에는 피스토이아로 파견되어 내분 수습을 시도했다.
1502년에는 로마냐 지역으로 파견되어 체사레 보르자와 그의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가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장악하려는 과정에서 보여준 냉혹한 현실 정치와 국가 건설 방식을 목격했다.[28] 당시 우르비노를 정복한 체사레 보르자와 직접 만나 협상을 벌여 피렌체와의 화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같은 해 이몰라에서 성채 설계를 위해 방문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도 만났으며, 그해 겨울 동안 다 빈치, 체사레 보르자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해지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후에도 다 빈치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군사적으로는 용병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시민군 창설을 강력히 주장했다(1504년).[29] 그는 용병이 애국심이 없고 충성심이 변덕스러워 신뢰할 수 없다고 보았다.[30] 대신 시민들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1506년에는 시민군 군부 서기가 되었고, 콘타도(Contado, 피렌체 지배하의 농촌 지역)의 농민들을 징집하여 민병대를 창설했다.[29] 이 시민군은 1509년 피사를 정복하는 데 기여했다.[31]
그러나 그의 공직 생활은 1512년 8월 막을 내렸다. 율리오 2세의 지원을 받은 메디치 가문이 스페인 군대를 동원하여 프라토에서 피렌체 시민군을 격파하면서 피렌체 공화정은 무너졌다.[32] 피에로 소데리니 국가 원수가 망명하고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지배권을 회복하자, 마키아벨리 역시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1년간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2. 3. 실각과 저술 활동
1512년 8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지원을 받은 메디치 가는 스페인 군대를 이용하여 프라토에서 피렌체군을 패배시켰다.[32] 이 패배로 피렌체 공화정은 무너지고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지배권을 회복했다. 당시 피렌체 국가 원수였던 피에로 소데리니는 사임 후 망명했고, 공화정 시기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활약했던 마키아벨리 역시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1년 동안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1513년,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에 반대하는 음모(보스코리 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33] 그는 죄수의 손목을 뒤로 묶어 매달아 어깨를 탈구시키는 스트라파도(밧줄 고문)라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고 결국 3주 만에 풀려났다. 마침 같은 해 3월,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의 조반니 추기경이 교황 레오 10세로 선출되면서 내려진 교황 특사 덕분이었다.[166][167]
석방된 후, 마키아벨리는 산 카시아노 인 발 디 페사 근처 산탄드레아 인 페르쿠시나 (Sant'Andrea in Percussinait)에 있는 자신의 농장으로 은퇴하여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는 이 시기를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그는 정치적으로 연결된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고자 노력했다.[34] 당시 그의 심정은 친구 프란체스코 베토리 (Francesco Vettoriit)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서재로 간다. 현관에서 진흙과 더러움으로 뒤덮인 작업복을 벗고 대사가 입을 만한 옷을 입는다. 단정하게 차려입고 오래전에 죽은 통치자들의 고대 궁정에 들어선다. 거기서 나는 따뜻하게 환영받고, 영양가 있고 맛보기 위해 태어난 유일한 음식을 먹는다.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의 행동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들은 친절하게도 내게 대답한다. 4시간이 지나도 불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모든 걱정을 잊는다. 더 이상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통해 완전히 살아간다.[35]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들이 탄생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군주에게 헌정하기 위해 《군주론》 (Il Principe|일 프린치페it)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13년에 완성된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군주가 어떠한 수단이라도 사용할 수 있으며, 정치에는 종교나 도덕적 고려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현실주의적 정치 사상, 즉 '마키아벨리즘'을 제시하여 후대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65]
동시에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주의자들과 교류하며 공화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코시모 루첼라이(Cosimo Rucellaiit)가 주도한 '오리첼라리 정원의 모임'(Orti Oricellariit)에 참여했으며, 이 모임의 일원이었던 코시모 루첼라이에게 《로마사 논고》(또는 《리비우스론》, 원제: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티투스 리비우스의 첫 10권에 대한 논고it, 1517년)를 헌정했다. 이 책은 로마 공화정을 비롯한 여러 공화국의 역사적 경험을 분석하며 공화정의 우수성과 시민적 덕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저작으로, 피렌체 공화주의의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1520년에는 메디치 가문 출신인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후의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의뢰를 받아 《피렌체사》 (Istorie fiorentine|피렌체 역사it) 집필을 시작했으나, 1525년까지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완성하지는 못했다. 이 외에도 《전술론》 (Dell'arte della guerra|델라르테 델라 구에라it, 1519년–1520년) 등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2. 4. 죽음
1512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권력을 되찾자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해임되고 1년간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1513년에는 메디치 군주정에 대한 음모 혐의로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나, 혐의를 부인하고 3주 후 석방되었다.[33] 이후 그는 산 카시아노 인 발 디 페사 근처 산탄드레아 인 페르쿠시나에 있는 자신의 농장으로 은퇴하여 정치 논문을 연구하고 저술하는 데 전념했다.1527년, 마키아벨리는 58세의 나이에 위장 질환으로 사망했다.[36] 그는 최후의 성사를 받았다.[37][38] 당시 민간에서는 그가 부활하여 하루를 더 살다 죽었다는 믿기 어려운 전설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는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1789년 조지 클래버링-코퍼와 레오폴드 2세의 후원으로 이노첸초 스피나치가 조각한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페로니 박사가 쓴 라틴어 비문 "TANTO NOMINI NULLUM PAR ELOGIUM" ("그토록 위대한 이름에는 어떤 찬사도 부족하다")이 새겨져 있다.[39]
3. 정치철학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은 국가의 유지와 권력 획득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지도자의 성공을 위해 역량(virtù)과 운(fortuna)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능한 지도자는 역량을 통해 운이 제공하는 기회를 포착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보았다.[168] 인간 본성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며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한다고 파악했다.[168] 이러한 현실주의적 인간관은 그의 정치 사상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은 대표작인 『군주론』과 『리비우스에 관한 논고』(흔히 『로마사 논고』 또는 『정치론』)에서 잘 드러난다. 『군주론』은 주로 새롭게 권력을 잡은 군주를 위한 통치술을 다루며, 때로는 비도덕적인 수단의 필요성까지 언급하여 후대에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용어를 남겼다. 반면, 『로마사 논고』는 고대 로마 공화정의 성공 요인을 분석하며 공화주의 원리와 시민적 덕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두 저작은 각각 군주정과 공화정이라는 다른 정치체제를 다루고 있어, 그의 사상의 일관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65]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여러 고전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고대 크세노폰과 이소크라테스로부터 이어진 '군주론' 장르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이를 신흥 군주에게 적용하여 독창성을 보였다.[65] 또한 살루스투스 등 로마 역사가들의 저작에 나타난 고전 공화주의[68][69],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과는 다른 크세노폰 중심의 소크라테스 학파 정치 철학(특히 유물론적 관점)[70], 데모크리토스 등의 고전 유물론[70], 권력 정치를 강조한 투키디데스[71][72]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러한 사상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종합하여, 정치를 신학이나 도덕 철학에서 분리하고 현실적인 권력 작동 원리에 주목하는 새로운 정치 분석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73]
마키아벨리가 근대 정치사상의 진정한 창시자인지, 아니면 당대 사상의 특이한 사례인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65] 그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기독교가 정치적 역량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했으며[82][88], 종교를 사회 질서 유지와 통치를 위한 도구로 파악했다.[84][85][90]
그의 사상은 출간 이후 큰 반향과 논란을 일으켰다. 1559년 가톨릭교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지만[93], 토마스 크롬웰, 카를 5세 등 현실 정치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94][95] 이후 프랜시스 베이컨, 토머스 홉스, 스피노자, 장 자크 루소 등 근대 철학자들과[105][108][109], 특히 존 애덤스를 비롯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영향을 주며 공화주의 사상의 발전에 기여했다.[116][117][121]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은 오늘날까지도 정치와 권력, 도덕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중요한 사상적 자원으로 남아 있다.
3. 1. 현실주의 정치사상
마키아벨리는 국가의 이익과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는 현실주의적인 정치 사상을 제시했다. 그는 지도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역량(virtù)을 갖추어야 하며, 이를 통해 기회를 포착하고 운(fortuna)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168] 운은 예측 불가능한 요소이지만, 역량 있는 지도자는 행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168]마키아벨리는 인간 본성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는 인간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사악하며, 심지어 가족보다 재산과 같은 자신의 욕망을 더 중시한다고 주장했다.[168] 이러한 인간관 때문에 그는 관대함이나 자비와 같은 전통적인 미덕이 실제 정치에서는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대한 평판을 얻으려다 재산을 탕진하면 결국 백성에게 증오를 받거나 무시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168]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에도 인간을 지나치게 저평가한다는 비판을 받았다.[168]
그의 정치사상은 종종 마키아벨리즘으로 불리며,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현실주의로 요약된다. 그는 군주가 국가를 보존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나 잔혹함, 기만, 폭력과 같은 비정한 수단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6][74] 그는 "사랑받는 것과 두려움을 받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상적으로는 둘 다 좋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두려움을 받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답했다.[75] 이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 때문에 은혜는 쉽게 배신당할 수 있지만,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배신을 막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대표 저작인 『군주론』과 『리비우스에 관한 논고』(흔히 『논고』)에 잘 나타나 있다.
- 『군주론』: 주로 새롭게 권력을 잡은 군주가 어떻게 국가를 통치하고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을 담고 있다. 전통적인 '군주론' 장르를 따르면서도, 세습 군주가 아닌 신흥 군주에게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65]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국가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면 비도덕적인 행동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마키아벨리적'이라는 단어가 기만, 폭정, 정치 공작의 대명사가 되게 만들었다. 레오 슈트라우스와 같은 학자는 마키아벨리가 스스로 '악의 교사'임을 자처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77][78] 반면, 베네데토 크로체나 에른스트 카시러 같은 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단순히 정치 현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현실주의자 또는 정치 과학자라고 보았다.[79][80]
- 『리비우스에 관한 논고』: 고대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의 저술을 바탕으로 공화정의 수립과 유지, 시민의 역할 등에 대해 논한다. 『군주론』보다 공화정의 장점을 더 강조하지만[57], 부패한 공화정을 구하기 위해서는 로물루스가 형제 레무스와 공동 통치자 티투스 타티우스를 살해하고 권력을 잡았던 것처럼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강력한 군주정으로 돌아갈 필요성도 언급한다.[58][59] 이 책은 근대 공화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64]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신학이나 도덕 철학으로부터 분리하고, 실제 역사적 사실과 경험에 기반하여 정치 현상을 분석하려 했다는 점에서 현대 정치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73] 그는 과거 역사, 특히 도시 건설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지만, 전통적인 고전 교육이 실제 정치를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73]
그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기독교가 겸손을 미덕으로 삼고 내세를 중시함으로써 현실 정치에서 필요한 야망, 용기, 영광 추구를 약화시킨다고 보았다.[88] 그는 고대 로마가 몰락한 원인 중 하나로 기독교가 애국심과 시민적 덕성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68] 마키아벨리에게 종교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군주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는 도구로서의 가치를 지녔다.[84][85] 그는 위대한 군주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종교적일 필요는 없지만,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종교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90]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다양한 고전 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창적인 측면 또한 가지고 있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준 요소로는 크세노폰이나 이소크라테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군주론' 장르의 전통, 살루스투스 등 로마 역사가들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고전 공화주의,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보다는 크세노폰으로 대표되는 소크라테스 학파의 정치 철학(특히 목적론을 거부하고 유물론적 관점을 취한 점),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와 같은 고전 유물론, 그리고 권력 정치를 강조한 투키디데스 등이 거론된다.[68][69][70][71][72]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영향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종합하여 정치에 대한 새롭고 현실적인 접근 방식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5]
한편,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의 시민군을 이상화하며 당시 프랑스군이 강력했던 이유를 징병제 덕분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작 그가 조직하려 했던 피렌체 시민군은 당시 용병들에 비해 전투력이 약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169]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많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일본의 윤리학자 토모에다 타카히코는 마키아벨리가 토머스 홉스처럼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만 보고 국제 관계에서 도덕을 부정하며 기만과 폭력만을 강조했다고 비판했다.[164] 그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정치와 도덕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3. 2. 군주론

마키아벨리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군주론》(Il Principe)은 정치에 관한 여러 격언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전통적인 세습 군주보다는 권력을 새롭게 획득한 "새로운 군주"에게 초점을 맞춘다. 세습 군주는 기존 질서 속에서 백성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통치하면 되지만,[40] 새로운 군주는 권력을 안정시키고 지속 가능한 통치 구조를 세워야 하는 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안정과 안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도덕적 타락도 감수해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공적인 영역에서의 도덕과 사적인 영역에서의 도덕은 구분되어야 하며,[41] 군주는 좋은 평판에만 얽매이지 않고 필요하다면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을 주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애정이나 의무감보다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더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두려움을 주는 지도자가 권력을 유지하기 더 쉽다고 보았기 때문이다.[42] 또한 그는 군주의 권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귀족 가문 전체를 몰살하는 것을 포함한 무력 사용이나 기만 행위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43] 폭력은 정적을 제거하고, 저항하는 이들을 굴복시키며,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46]
이러한 주장 때문에 《군주론》은 종종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로 요약되곤 한다.[44]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성공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사기와 기만을 필수적인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45] 그는 키케로가 이중성과 폭력을 피하라고 조언한 것과 달리, 군주는 "함정을 피하기 위해 여우처럼 교활해야 하고, 늑대를 제압하기 위해 사자처럼 강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의 가장 유명한 비유 중 하나가 되었다.[47] 이처럼 국가를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악한 수단이 필요하다는 마키아벨리의 견해는 《군주론》의 핵심 주제로 여겨지며,[48] 그에게 악명을 안겨주었고 '마키아벨리적(Machiavellian)'이라는 형용사를 남겼다.[49]
《군주론》의 내용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1559년 가톨릭교회는 이 책을 금서 목록에 포함시켰다.[50][51] 에라스무스(1466년경–1536년)를 비롯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도 이 책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군주론》은 정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현실적인 방법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했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정치적 현실주의와 정치적 관념론 사이의 중요한 분기점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군주론》에서 보이는 군주정 옹호와 《리비우스에 관한 논고》에서 나타나는 공화주의적 경향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군주론》이 군주를 위한 조언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공화정의 우월성을 암시한다고 보기도 한다. 18세기 장 자크 루소(1712–1778)와 같은 사상가는 《군주론》을 군주정을 비판하기 위한 풍자로 해석하기도 했다.[52][53]
레오 슈트라우스(1899–1973)나 하비 맨스필드(1932년 출생) 같은 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저작에 의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포함시켰다고 주장한다.[54] 맨스필드는 이를 마키아벨리가 심각한 문제들을 인간이 조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머러스하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기 때문에 진지하게 다루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55]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는 《군주론》의 진정한 독자가 지배 계급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통치 기술을 알아야 할 일반 대중이라고 주장했다.[56]
마키아벨리 연구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는 그의 저작들이 통일성을 가지는지, 그의 철학적 성격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사상이 얼마나 혁신적인지에 대한 것이다.[65] 레오 슈트라우스와 같은 학자들은 마키아벨리를 근대를 연 인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그가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마키아벨리 자신은 때로는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미덕을 이탈리아인들에게 상기시키는 인물로, 때로는 정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하는 인물로 자신을 묘사했다.[65]
마키아벨리가 다양한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각 영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 '''군주론 장르:''' 앨런 길버트(Gilbert)는 《군주론》이 고대 크세노폰이나 이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군주의 거울(Mirror for Princes)" 장르와 유사점을 가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 장르를 세습 군주가 아닌 "관습에 맞서 자신을 확립해야 하는 새로운 군주"에게 적용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65]
- '''고전 공화주의:''' 퀸틴 스키너나 J.G.A. 포콕과 같은 "케임브리지 학파" 학자들은 마키아벨리의 정치 저작, 특히 《리비우스에 관한 논고》에 나타나는 공화주의적 주제들이 살루스투스와 같은 고전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중세 이탈리아 문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68][69]
- '''고전 정치 철학:''' 소크라테스 학파,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가톨릭화된 형태나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등의 아베로이스주의 형태로 중세 유럽 정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키아벨리는 가톨릭 정치 사상을 비판했으며 아베로이스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지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직접적으로 긍정하지는 않았다. 레오 슈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에게 소크라테스 사상의 주요 원천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역사가이자 군인이었던 크세노폰이었다고 주장한다. 마키아벨리는 자연의 목적론적 관점과 철학이 정치보다 우월하다는 소크라테스 학파의 견해를 거부하고, 유물론적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70] 그는 폴리비우스, 플루타르크, 키케로 등을 통해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 '''고전 유물론:''' 슈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와 같은 고전 유물론자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고전 유물론자들이 정치 생활에 대해 소크라테스 학파와 같은 존중을 보이지 않았던 반면, 마키아벨리는 정치 생활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70]
- '''투키디데스:''' 일부 학자들은 마키아벨리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 사이에 권력 정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적한다.[71][72]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투키디데스가 고귀함의 내재적 우월성을 인정하고 비극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마키아벨리의 저작에는 코미디나 풍자는 있어도 비극성은 부재하며, 이는 그가 "공동체의 신성함"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65]
마키아벨리 사상의 혁신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주로 언급된다.
마키아벨리는 때때로 경험적 사실과 역사적 사례로부터 일반 원칙을 도출하고, 상상에 기반한 이론화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현대 경험주의 과학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65] 조슈아 카플란은 2005년에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그는 정치를 신학과 도덕 철학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는 통치자들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를 단순히 묘사하려고 노력했고, 따라서 선과 악의 문제는 무시되고 관찰자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 발견하려고 시도하는 이른바 과학적 정신을 예견했다.[73]
그는 전통적인 교육 방식이 정치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지만, 과거, 특히 도시 건설의 역사를 깊이 연구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73] 그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는지를 연구하여 지도자들에게 통치 방법을 알려주고자 했다. 마키아벨리는 덕(virtue) 있게 사는 것이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고전적인 견해를 부정했다. 예를 들어, 그는 인색함(비참함)을 "군주가 통치할 수 있게 하는 악덕 중 하나"로 보았다.[74] 그는 "사랑받는 것과 두려움을 받는 것 둘 다 얻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둘을 동시에 얻기 어렵다면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을 받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말했다.[75] 그의 저작에서는 군주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잔혹함이나 사기 같은 비도덕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자주 언급된다.[76]
이러한 현실주의적 접근 때문에 그의 도덕성에 대한 논쟁은 4세기 동안 이어져 왔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적'이라는 단어를 기만, 폭정, 정치 공작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레오 슈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가 스스로 "악의 교사"임을 자각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군주들에게 정의, 자비, 절제, 지혜, 민중에 대한 사랑 대신 잔혹함, 폭력, 공포, 기만을 권했기 때문이다.[77] 슈트라우스는 이러한 전통적 견해를 받아들여야만 "그의 사상의 대담함"과 "그의 말의 우아한 미묘함"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78] 반면, 이탈리아의 반파시스트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1925)는 마키아벨리가 단순히 현실주의자 또는 실용주의자로서, 도덕적 가치가 실제 정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묘사했을 뿐이라고 보았다.[79]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1946)는 마키아벨리가 정치 생활의 '사실'과 도덕적 판단의 '가치'를 분리함으로써 정치학자, 즉 '정치학의 갈릴레오'의 입장을 취했다고 주장했다.[80] 한편, 월터 러셀 미드는 《군주론》의 조언이 정치 시스템 변화에 있어 정당성과 같은 개념의 중요성을 전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81]
마키아벨리는 당대의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특히 기독교가 정치와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부정적이었다.[82] 그는 기독교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결합하면서 현실적인 결정이 이상적인 목표에 지나치게 좌우되게 만들고, 사람들이 사건의 결과를 섭리나 운명(fortuna)에 맡기도록 방치한다고 비판했다. 기독교는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마키아벨리는 야망, 기백, 영광 추구를 훌륭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으며, 이는 훌륭한 군주가 갖추어야 할 역량(virtù)과 신중함(prudenza)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맨스필드는 마키아벨리가 사용한 'virtù' 개념을 "악과의 타협"으로 묘사하기도 했다.[83]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미덕과 신중함을 통해 운명(fortuna)에 맞서 자신의 미래를 더 많이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접근 방식은 그의 희극이나 서신에서 드러나는 사랑과 욕망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난다고 존 나제미(John Najemy)는 주장한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친구 베토리(Vettori)가 운명에 대한 더 전통적인 이해를 내세우며 마키아벨리에게 반박했던 사례를 제시한다.[65]
마키아벨리 시대의 인문주의 역시 미덕과 신중함을 통해 미래를 통제하려는 노력을 중시했으므로, 이러한 생각이 마키아벨리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전통과 법률에 저항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데 따르는 영광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인문주의자와는 달랐다.
마키아벨리의 접근 방식이 고전 사상을 새롭게 조합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슈트라우스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형식적 인과 관계나 종결적 인과 관계(목적론)를 포함하는 설명을 거부하는 유물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70] 그는 지도자들 사이의 야망을 부추기고, 특히 새로운 방식과 질서를 창조함으로써 위험 감수와 혁신을 장려했다. 이는 정치와 문명의 목표로서 진보라는 개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기치아르디니를 비롯한 마키아벨리의 후계자들은 전쟁보다는 경제 발전을 통한 평화로운 진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65] 하비 맨스필드는 "행운을 극복하는 다른 더 규칙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마키아벨리의 후계자들은 그의 미덕 개념을 공식화하고 무력화시켰다"고 썼다.[65]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일부 고전적인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야망과 기백, 그리고 따라서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간 본성의 일부로 보았다.
슈트라우스는 1958년 저서 ''마키아벨리에 대한 생각''을 마무리하면서, 이러한 진보의 촉진이 선량한 정부와 악한 정부 모두에서 새로운 기술의 발명으로 직접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슈트라우스는 현대 이전에도 존재했고 평화로운 문명의 붕괴로 이어진 이러한 군비 경쟁의 불가피한 본질을 통해 고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말로 하면 좋은 도시가 악한 도시의 행위에 의해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점, 또는 악한 도시가 선한 도시에 그들의 법을 부과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고 주장했다.[65]
3. 3. 로마사 논고
《티투스 리비우스 초기 10권에 대한 논고》(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디스코르시 소프라 라 프리마 데카 디 티토 리비오it )는 1517년경 집필되어 마키아벨리 사후인 1531년에 출판된 저작으로, 흔히 '로마사 논고', '리비우스 논고', '디스코르시', '정치론' 등으로 불린다.[65]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의 저술을 바탕으로 공화정의 운영 원리와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자신의 정치 사상을 심도 있게 펼쳐 보인다.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의 성공 사례를 분석하며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한 원칙들을 제시했다. 그는 공화정이야말로 시민의 자유와 국가의 영광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 체제라고 보았지만, 동시에 공화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패하기 쉽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공화정이 심각하게 부패했을 때는 이를 구하기 위해 강력하고 때로는 비정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초기 건국의 강력한 원칙, 즉 "왕정 상태"와 같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공화정의 지도자들을 때때로 "군주"라고 지칭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군주정을 다룬 《군주론》과의 사상적 일관성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65]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시민병 제도를 높이 평가했다.[169] 그는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의존하던 용병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시민들로 구성된 군대가 애국심과 충성심을 바탕으로 국가를 더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동시대 프랑스군이 스위스 용병을 활용해 이탈리아 용병을 격파한 것을 징병제에 기반한 시민군의 우수성 사례로 해석하기도 했으나, 실제 그가 구상했던 피렌체 시민군은 전문적인 용병 부대에 비해 전투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169]
또한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기독교가 현실 정치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기독교가 내세우는 겸손과 내세 지향적인 가치가 시민들의 현세적인 덕성, 즉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애국심, 용맹함 등을 약화시켜 로마 제국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대 로마인들이 가졌던 세속적인 '비르투'(virtù, 역량/덕)를 강조하며, 이것이 국가의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다.[82][83]
《로마사 논고》는 후대의 정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퀸틴 스키너나 J.G.A. 포콕과 같은 "케임브리지 학파" 학자들은 이 책에 나타난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 사상이 살루스투스 등 고전 로마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중세 이탈리아의 인문주의 및 공화주의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강조했다.[68][69]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고전 정치 철학, 특히 크세노폰의 현실주의적 접근 방식[70], 고전 유물론[70], 그리고 투키디데스의 권력 정치 분석[71][72] 등 다양한 사상적 흐름과 연결되며, 그가 단순히 고대의 사상을 부활시킨 것인지, 아니면 근대 정치 사상의 새로운 지평을 연 독창적인 사상가인지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65] 레오 슈트라우스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마키아벨리를 의도적으로 근대성 자체를 창시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65]
3. 4. 마키아벨리즘
흔히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로 요약되는 마키아벨리즘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권모술수를 포함한 비도덕적인 수단도 허용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이 명제는 모든 종류의 목적이 아닌, 정치적으로 '좋은 목적', 즉 공동체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경우를 절대적으로 전제한다. 마키아벨리는 좋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좋은 수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170] 좋은 수단만으로는 결코 좋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냉혹하고 정직한 현실 인식은 마키아벨리즘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예를 들어, 민중의 뜻을 배반하고 헌법 원칙을 위반하며 악법을 강행하려는 권력에 맞설 때, 평화적이고 좋은 방법만으로는 민의라는 좋은 목적을 지키기 어려울 수 있다. 때로는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악법 통과를 저지해야 할 필요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평화적인 방법만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면 수많은 전쟁과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정치에 있어서 결과가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철학에서 말하는 책임윤리처럼, 정치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행위이며, 그 책임은 결과로 평가받는다. 아무리 과정이 훌륭했더라도 결과가 나쁘면 실패로 귀결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마지막에 변절한 인물들이 친일분자로 분류되는 것처럼,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정치에서는 목적 달성 여부, 즉 결과가 엄중하게 평가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즘은 여러 논쟁점을 안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좋은 목적', 즉 공공의 이익을 과연 누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현대 사회는 가치 판단이 매우 복잡하며, 무엇이 공동체 전체를 위한 최선인지 합의하기 어렵다. 절대윤리와 상대윤리가 혼재하고, 수단과 목적의 구분조차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수단이 목적이 되기도 하고, 목적이 다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공적 이익의 개념 자체를 놓고도 사회주의자와 자본주의자의 대립처럼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진다. 다만,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는 비교적 사회 구조가 단순하여 선악 구분이 명확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를 선각자로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한다.[170]
마키아벨리는 인간을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자신의 이익, 특히 재산을 중시하는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군주는 민중에게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통치에 더 안전하다고 주장했다.[75] 그는 군주가 함정을 간파하는 '여우'의 지혜와 이리를 물리치는 '사자'의 힘을 겸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군주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할 때는 약속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거나 "힘이 없는 선은 악보다도 못하다", "악행은 단번에 저질러야 하고 선행은 오랜 기간을 두고 조금씩 베풀어야 한다" 와 같은 주장을 통해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비정하고 계산적인 수단도 불사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는 정치를 신학이나 도덕 철학으로부터 분리하여 현실적인 권력 작동 원리에 주목하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한다.[73]
한편, 앤터리 패럴은 "만일 마키아벨리즘에 비판과 의문이 제기된다면, 인간, 근대성 자체에 대한 의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한 가지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를 공격한다 해도 근대성의 문제로부터 이 세계를 구할 수 없다"고 말하며 마키아벨리를 옹호하기도 했다.[171]
4. 군사 이론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군사 사상을 『군주론』뿐만 아니라 『정략론』과 『전술론』에도 기록했다. 그의 군사 이론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군주론』에서 군주에게 필요한 요소로 법률과 함께 군비를 제시했다. 또한 용병보다 상비군 편제를 중시하고 시민군(국민군)의 효용성을 강조했으며, 기병보다 보병의 중요성을 더 높게 평가했다.
# 군사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사 훈련을 수준에 따라 단계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1단계 정렬 동작 훈련, 2단계 정렬 행진 동작 훈련, 3단계 전투 훈련, 4단계 신호 및 명령 전달 교육 순으로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 사령관의 군사적 지휘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군대의 결속력이 사령관의 지휘 능력에 달려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지휘력은 혈통이나 권위가 아닌 용기와 선행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또한 효과적인 지휘를 위해 연설 능력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피렌체 공화국이 피사를 포위 공격했을 때, 피사 측은 아르노 강의 수운을 이용해 바다로부터 물자를 보급받았다. 이에 군사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아르노 강의 물길을 피사 외곽으로 돌리는 작전을 구상했다. 당시 부관으로 종군하던 마키아벨리는 다 빈치의 계획을 채택하여 1504년부터 공사를 시작했으나, 당시 토목 기술의 한계로 아르노 강 수로 변경 공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157]
5. 주요 저작
메디치가의 군주에게 헌정한 《군주론》(Il Principeit)과 《로마사 논고》(정략론)가 그의 대표적인 정치 저작으로 꼽힌다. 이 저작들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은 주권자의 자율성 확보에 있다. 《로마사 논고》와 《군주론》은 각각 공화주의와 군주주의를 다루는 것처럼 보여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하며, 그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학술적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 희곡 《만드라골라》(La Mandragolait)는 이탈리아 연극사에서 중요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5. 1. 정치·역사 저작
메디치가의 군주에게 바친 《군주론》(Il Principe)과 《로마사 논고》(정략론) 등이 유명하다. 이 주요 저작들을 관통하는 그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주권자의 자율성이다. 《로마사 논고》와 《군주론》은 각각 공화주의와 군주주의라는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는 듯하여 엇갈린 평가를 받으며, 그 진정한 의도에 대해서는 학술적 논란이 있다. 희곡 《만드라골라》(La Mandragolait)는 이탈리아 연극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군주론 ===
마키아벨리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저서 《군주론》(Il Principe)은 정치에 관한 여러 격언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전통적인 세습 군주보다는 새롭게 권력을 잡은 "신생 군주"에게 초점을 맞춘다. 세습 군주는 백성들이 익숙한 기존 질서를 신중하게 유지하며 권력을 지키면 되지만,[40] 신생 군주는 통치에 있어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는 새롭게 얻은 권력을 안정시키고 지속적인 정치 구조를 세워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안정과 안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도덕적 비난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적 영역에서의 도덕과 사적 영역에서의 도덕은 구분되어야 하며, 훌륭한 통치를 위해서는 이 둘을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다.[41] 따라서 군주는 단순히 좋은 평판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파렴치한 행동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보았다. 사랑받는 군주는 백성들의 의무감에 의존하지만, 두려움을 주는 군주는 처벌에 대한 공포로 통치력을 확보하기 때문이다.[42] 정치 이론가로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권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 특히 귀족 가문 전체를 제거하는 것을 포함하여, 무력이나 기만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의 "필요성"을 강조했다.[43]
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국가 건설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옹호했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종종 《군주론》에서 비롯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로 요약된다.[44]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반드시 사용해야 할 수단으로 사기와 기만을 제시했다.[45] 권력을 성공적으로 안정시키고 새로운 정치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할 수 있다. 폭력은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저항하는 세력을 파괴하며, 군주를 대체하려는 다른 강력한 인물들을 제거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46] 마키아벨리는 한 구절에서 키케로가 이중성과 폭력을 피하라고 한 조언을 뒤집으며, 군주는 "올가미를 피하기 위해 여우가 되고, 늑대를 제압하기 위해 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마키아벨리의 가장 유명한 격언 중 하나가 되었다.[47] 국가를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악한 수단이 필요하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이 책의 핵심 주제로 여겨진다.[48] 이러한 정치적 조언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악명을 얻었으며, 그의 이름에서 파생된 "마키아벨리적(Machiavellian)"이라는 형용사는 기만적이고 냉혹한 정치 술수를 의미하게 되었다.[49]
《군주론》의 논란 많은 정치 분석 때문에 1559년 가톨릭교회는 이 책을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올렸다.[50][51] 에라스무스 (1466년경–1536년)를 포함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도 이 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정치사상사에서 이 책의 주요한 기여는 정치적 현실주의와 정치적 관념론 사이의 근본적인 단절을 보여주며, 정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지침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마키아벨리는 이상적인 사회 모델을 군주가 추구해야 할 목표로 제시하지 않았다.
《군주론》에서 보이는 무자비한 군주에 대한 조언과 《로마사 논고》에서 나타나는 공화주의적 권고 사이의 차이점과 유사점에 대해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군주론》이 군주를 위한 조언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로마사 논고》에서 발견되는 공화정 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과 유사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본다. 18세기 장 자크 루소(1712년–1778년)와 같은 사상가들은 《군주론》을 군주정의 폐해를 고발하기 위한 풍자로 해석하기도 했다.[52][53]
레오 슈트라우스(1899년–1973년)와 하비 맨스필드(1932년 출생) 같은 학자들은 《군주론》을 포함한 마키아벨리의 저술 일부에는 의도적으로 모호하거나 숨겨진 의미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54] 맨스필드는 마키아벨리가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그것이 "인간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머러스하게 접근하고, 동시에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기" 때문에 진지하게 다룬다고 해석했다.[55]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년–1937년)는 마키아벨리가 염두에 둔 독자는 이미 통치 방법을 알고 있는 지배 계급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 대중이었다고 주장했다.[56]
=== 로마사 논고 (리비우스에 관한 논고) ===
1517년경 집필되어 1531년에 출판된 《티투스 리비우스의 처음 열 권에 관한 논고》(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 흔히 《논고》(Discorsi) 또는 《정략론》으로 불리는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초기 고대 로마 역사에 대한 논의이지만, 주제에서 벗어나 동시대 정치 사례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마키아벨리는 이 책을 통해 공화정을 건설하고 조직하는 방법에 대한 교훈을 제시하고자 했다. 《군주론》보다 분량이 훨씬 방대하며, 공화정의 장점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지만, 다른 저작들과 유사한 주제를 다루기도 한다.[57]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는 부패한 공화정을 구하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왕정 상태"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58] 그는 로물루스가 자신의 형제 레무스와 공동 통치자 티투스 타티우스를 살해하여 절대 권력을 장악한 행위를, 그가 "문명화된 삶의 방식"을 확립했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59] 마키아벨리가 공화정의 지도자들을 종종 "군주"라고 칭하기 때문에, 《군주론》과 《논고》가 얼마나 일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60] 마키아벨리는 때때로 폭군들의 조언자 역할을 자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61][62] 다른 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묘사한 공화정의 팽창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지적했다.[6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근대 공화주의 사상의 핵심 텍스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종종 《군주론》보다 더 포괄적인 저술로 평가받는다.[64]
=== 기타 정치·역사 저작 ===

마키아벨리는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외에도 다수의 정치 및 역사 관련 저작을 남겼다. 그의 저작 목록은 다음과 같다.
- 《피사 공략론》(Discorso sopra le cose di Pisait) (1499년)
- 《키아나 계곡 반란 진압론》(Del modo di trattare i popoli della Valdichiana ribellatiit) (1502년)
- 《체사레 보르자의 비텔로초 비텔리,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 파골로 영주, 그리고 그라비나 공작 암살 방식에 대한 서술》(Descrizione del modo tenuto dal Duca Valentino nello ammazzare Vitellozzo Vitelli, Oliverotto da Fermo, il Signor Pagolo e il duca di Gravina Orsiniit) (1502년)
- 《재정 확보론》(Discorso sopra la provisione del danaroit) (1502년)
- 《프랑스 관련 기록》(Ritratti delle cose di Franciait) (1510년)
- 《마냐 관련 기록》(독일 관련 기록) (Ritracto delle cose della Magnait) (1508년–1512년)
- 《군주론》(Il Principeit) (1513년 작성, 1532년 출판)
- 《티투스 리비우스 초기 10권에 대한 논고》(로마사 논고)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it) (1517년 작성, 1531년 출판)
- 《전술론》(군사론) (Dell'arte della guerrait) (1519년–1520년)
- 《피렌체 국가 개혁론》(Discorso sopra il riformare lo stato di Firenzeit) (1520년)
- 《루카 시 관련 요약》(Sommario delle cose della citta di Luccait) (1520년)
-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니 전》(Vita di Castruccio Castracaniit) (1520년)
- 《피렌체 역사》(Istorie fiorentineit) (1520년–1525년, 미완)
5. 2. 희곡 및 기타 저작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이나 로마사 논고 같은 정치 저술로 유명하지만, 고전 작품 번역가이자 희곡 작가, 시인, 소설가이기도 했다.특히 희곡 《만드라고라》(La Mandragolaita)는 1518년에 쓰여진 5막 산문 희극으로, 이탈리아 연극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20세기 들어 다시 주목받아 뉴욕 셰익스피어 페스티벌(1976년), 리버사이드 셰익스피어 컴퍼니(1979년), 뮌헨 안티 극장(1971년, 피어 라벤의 뮤지컬 코미디), 런던 영국 국립극장(1984년) 등에서 공연되었다.[124]
그의 다른 주요 문학 및 기타 저작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제목 | 원제 | 장르/설명 |
---|---|---|---|
1506 | 데체날레 프리모 | Decennale primoita | 테르자 리마 형식의 시 |
1509 | 데체날레 세콘도 | Decennale secondoita | 시 |
1514 | 언어에 관하여 | Della Linguaita | 이탈리아어에 관한 대화 형식의 저서 (마키아벨리 저작으로 추정) |
1515 | 벨파고르 아르키디아볼로 | Belfagor arcidiavoloita | 소설 (노벨라) |
1517 | 안드리아 | Andriaita | 테렌스의 작품을 각색한 반자전적 희극[135] |
1517 | 황금 당나귀 | Asino d'oroita | 아풀레이우스의 고전 작품을 재해석한 테르자 리마 형식의 시 |
1518 | 만드라고라 | Mandragolaita | 서문이 있는 5막 산문 희극 |
1525 | 클리지아 | Cliziaita | 산문 희극 |
1525 | 프라멘티 스토리치 | Frammenti storiciita | 역사 단편 |
이 외에도 마키아벨리는 Sonettoita(소네트), Canzoneita(칸초네), Ottaveita(옥타브), Canti carnascialeschiita(카니발 노래) 등 여러 형식의 시를 남겼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였던 줄리아노 데 리치(Giuliano de' Ricci)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스타일을 따라 당시 피렌체 인물들을 등장시킨 《Le Maschereita》(가면들)라는 희극을 썼다고 한다.[136]
6. 영향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후대에 광범위하면서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65] 그의 저서, 특히 주요 정치 저작인 『군주론』과 『리비우스에 관한 논고』는 정치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군주론』은 정치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으며[160], 마키아벨리는 국제정치학에서 현실주의 이론의 선구적인 사상가로 평가받는다.[161] 동시에 그는 공화주의 사상의 중요한 원류 중 하나로도 여겨지며[162], 퀸틴 스키너와 J.G.A. 포콕 등은 그의 공화주의적 주제가 살루스투스와 같은 고전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중세 이탈리아 문학에서 기원한다고 보았다.[68][69]
마키아벨리의 정치 사상은 흔히 '마키아벨리즘'으로 불리며, 때로는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를 의미하는 부정적인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163]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근대 서구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는 주로 공화정보다는 군주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영국의 토마스 크롬웰은 『군주론』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이는 헨리 8세의 종교개혁과 순례의 은총 진압 전술 등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94]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 역시 『군주론』을 소장하였다.[95] 프랑스에서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에 연관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6세기에는 가톨릭 작가들이 마키아벨리를 프로테스탄트와 연관지었고, 반대로 프로테스탄트 작가들은 그를 가톨릭 신자로 간주하는 등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96]
마키아벨리의 저작은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559년 금서 목록에 포함되어 가톨릭 지역에서의 출판이 제한되었고[93], 영국의 추기경 리지널드 폴, 포르투갈의 주교 제로니모 오소리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암브로지오 카테리노 폴리티 등이 초기에 비판가로 나섰다.[93] 특히 위그노였던 이노센트 젠틸레는 1576년 《반 마키아벨리》를 출판하여 마키아벨리를 무신론자로 비난하고 그의 저서를 "궁정의 코란"이라 칭하며 당대 정치인들에게 미친 악영향을 고발하였다.[97][98] 이후 조반니 보테로, 유스투스 립시우스 등 가톨릭 반종교개혁 작가들은 마키아벨리를 비판하면서도 그의 현실주의적 측면, 즉 군주의 명성 관리나 기만술의 필요성 등을 일부 수용하였다.[99] 이들은 마키아벨리와 달리 경제적 진보를 강조하며 타키투스를 현실 정치 조언의 원천으로 인용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를 "타키투스주의"라고 부른다.[100]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역시 볼테르의 후원을 받아 마키아벨리를 반박하는 《반 마키아벨리》를 저술하였다.[102]
마키아벨리는 근대 유물론 철학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마키아벨리가 형이상학적 가정에서 벗어나 현실에 기반한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근대 과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하였다.[105] 그의 사상은 장 보댕,[104] 얼저넌 시드니,[106] 제임스 해링턴, 존 밀턴,[107] 스피노자,[108] 장자크 루소, 데이비드 흄,[109] 에드워드 기번, 애덤 스미스 등 여러 사상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비록 논란 때문에 직접적인 언급은 적었지만, 몽테뉴,[110] 르네 데카르트,[111] 토머스 홉스, 존 로크,[112] 몽테스키외[113][114] 등 다른 주요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에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보다 인도주의적인 방향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103]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 사상은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16] 벤저민 프랭클린, 제임스 매디슨, 토머스 제퍼슨 등은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를 참조하여 신흥 귀족 세력의 등장을 경계하였다.[117] 알렉산더 해밀턴 역시 마키아벨리로부터 외교 정책의 중요성을 배웠지만, 공화정의 운영 방식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가졌다.[118][119] 존 애덤스는 마키아벨리를 가장 깊이 연구한 인물 중 하나로, 자신의 저서 《미국 정부의 헌법에 대한 변호》(A Defence of the Constitutions of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에서 마키아벨리를 혼합정체의 옹호자로 높이 평가하였다.[121] 애덤스는 마키아벨리가 정치에 경험적 이성을 도입하고 파벌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했다고 보았으며,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과 사회 변화의 순환론에도 동의하였다.[121]
20세기에는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주목하였으며,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군주론』을 읽고 직접 주석을 달았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요약 기반)
마키아벨리의 이름은 대중문화에도 흔적을 남겼다. 영국 르네상스 연극에서는 그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꾼 '마키아벨'(Machiavel)이라는 용어가 권력 유지를 위해 무자비한 수단을 사용하는 악당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으며, 이는 오늘날 '마키아벨리적'(Machiavellian)이라는 형용사의 어원이 되었다.[130][131][132] 크리스토퍼 말로의 희곡 ''몰타의 유대인''(약 1589년)에는 마키아벨을 모델로 한 인물이 등장하여 냉소적인 정치관을 드러내며[133],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에서도 주인공이 ''헨리 6세, 3부''에서 마키아벨리를 "살인적인 마키아벨"이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134]
7. 평가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서 『군주론』은 정치학 분야에서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으며[160], 그는 국제정치학에서 현실주의 사상을 개척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61] 또한 공화주의 사상의 중요한 원류로도 여겨진다.[162] 마키아벨리의 정치 사상은 이후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용어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 용어는 때때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하는 방식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163]
한편,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일본의 윤리학자이자 교육자였던 토모에다 타카히코(友枝高彦|토모에다 타카히코일본어, 1876-1957)는 인간의 이기심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마키아벨리를 비판했다. 그는 토머스 홉스가 "인류는 서로 늑대다"라고 말한 것처럼 마키아벨리 역시 국제 관계에는 도덕이 부재하며 오직 기만과 폭력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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